비가 오고 나서는 기온이 떨어졌네요. 갑자기 가을이 왔어요.

비가 내리고 난 후에는 항상 공기가 조금 다르게 느껴져요. 어쩐지 비가 그치면 세상이 한결 깨끗해지고, 기온도 한층 쌀쌀해지는 것 같아요. 이번에도 그랬죠. 비가 한차례 지나가고 나니, 그저 시원해지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던 공기가 어느새 서늘하게 느껴졌어요. 그 순간 "가을이 정말 왔구나"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어요. 그 전까지만 해도 여름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었는데, 이제는 확실히 계절이 바뀐 기분이 들어요.

창밖을 바라보면, 나무들이 천천히 변해가는 모습이 눈에 띄어요. 잎사귀 끝부분이 어느새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더라고요. 아직은 초록이 더 많지만, 그 중간중간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는 증거들이 숨어있어요. 예전엔 언제 가을이 오려나 기다렸던 적도 있었는데, 이번엔 오히려 깜짝 놀랐어요. 여름이 언제 이렇게 물러갔는지, 기온이 언제 이렇게 차가워졌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갑작스럽게 변한 거죠.

 

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면, 괜히 마음도 쓸쓸해져요.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더위에 지쳐있던 내 몸이, 이제는 따뜻한 옷을 꺼내 입어야 할 시간이 왔다는 걸 깨닫게 해주니까요. 언제부턴가 옷장 한쪽에 밀어놨던 니트를 다시 꺼내보니, 손끝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잠시 웃음이 나왔어요. 이 옷을 입고 나가면 아침 저녁으로 더 이상 춥지 않겠죠. 마치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. 가을은 그런 계절인 것 같아요. 조금은 차갑지만, 그 속엔 언제나 따뜻한 추억들이 숨겨져 있는.

 

하늘도 변했어요. 여름에는 해가 길어져 저녁 늦게까지도 환했는데, 이제는 어느새 해가 짧아졌어요. 금방 어두워지고, 그 어둠 속에서 가끔씩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코끝이 찡해져요. 저 멀리서 들리는 바람 소리마저도 평소보다 더 날카롭게 들리는 것 같아요. 그런가 하면, 가끔은 하늘이 유난히 맑게 보일 때도 있어요. 구름이 한없이 높아지고, 그 아래로 펼쳐진 파란 하늘은 여름보다 더 청명하게 느껴져요.

 

가을은 확실히 감정의 계절이에요. 어느 순간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들고, 조용히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게 해줘요. 괜스레 옛 추억들을 떠올리게 하고, 서랍 속 깊이 묻어뒀던 기억들을 다시 꺼내보게 해요. 길을 걷다가도 문득, 예전 가을에 느꼈던 그 따뜻한 햇살이나,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가 떠오르곤 해요. 지금의 나는 예전과 달라졌을지 몰라도, 가을의 그 느낌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더라고요.

 

이렇게 가을이 오면 자연스럽게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싶어져요. 창가에 앉아,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을 들으며 커피 잔을 손에 쥐고 있으면, 그 순간만큼은 세상이 아주 고요해져요. 무언가 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사라지고, 시간마저도 멈춘 것 같아요. 밖에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들리고, 그 속에서 나는 조용히 내 생각에 잠겨 있어요. 이런 시간이 오랜만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거죠. 여름에는 쫓기듯 바쁘게 지냈던 것 같아요. 하지만 가을은, 잠시라도 멈춰 서서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돌아볼 수 있는 계절이에요.

 

비가 내린 뒤, 차가워진 공기 속에서 나는 오늘도 가을을 마주했어요. 여름의 끝과 가을의 시작이 이렇게 가까이 다가올 줄은 몰랐어요. 그러나 이제는 그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따뜻함을 느끼며, 천천히 이 계절을 즐기고 싶어요. 낙엽이 조금씩 떨어지고, 바람이 더욱 서늘해질 때까지, 나는 가을의 모든 순간을 담아두려 해요. 분명히 다시 찾아올 겨울 앞에서, 이 가을이 더 특별하게 기억될 테니까요.